임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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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존성 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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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13-07-30 23:30 1,489회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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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군 대흥면과 광시면, 홍성군 금마면의 분기점인 해발 484m인 봉수산과 그 동쪽 봉우리들을 에워싼 석축산성으로 험절함이 중국에까지 알려 질 정도였다. 성 바깥벽은 돌로 쌓고 안은 흙으로 채운 내탁법(內托法)으로 축조되었다. 성안에는 계단식의 단축을 만들어 최대한 많은 주민을 수용할 수 있게 하였으며 우물이 3곳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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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는 2.8Km로 백제의 성으로 최대급 규모였다. 이곳에서 공주와 부여까지의 거리가 90리로 백제 도성의 안전과 직결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흑치상지가 사람들을 불러모아 임존성에 들어가 의거하여 굳게 지키니 열흘이 못되어 들어오는 자가 3만명이 넘었다고 <삼국사기>에 전한다.
이곳에서 그는 복신과 함께 나당군을 몰아내기 위한 항전의 횃불을 올렸다. 흑치상지가 임존성에 거점을 확보하자 백제의 의병들은 남잠성과 정현성을 근거지로 하여 나당군에 대항하였다.
한편 좌평 정무(正武)는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두시원악(청양군 정산면)에 진을 치고 나당군을 공격하였다.
이처럼 도처에서 의병들이 일어나자 당은 백제의 멸망을 기정사실화하려는 듯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1층 탑신부에 4면을 돌아가며 서둘러 글자를 새겼다.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란 제목의 이 글로 인해 부여에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당이 백제를 멸하고 나서 세운 전승기념탑으로 오해되어 해방 후 허물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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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6일 신라군은 임존성을 총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소책만 깨뜨리고 물러섰다. 이후 난공불락의 요새 임존성은 부흥운동의 중심지로 최후까지 남아 있었다.

이때 '일본서기'에는 모국이 망했다고 통탄을 하면서 앞으로 조상묘를 어떻게 찾아가느냐고 하더니 8년후 국호를 ''에서 '일본'으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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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의 연결고리를 끊고서 새롭게 홀로서기를 하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여기까지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내용이니 일본도 반박할 건더기가 없을테고 그런 일로 일본은 호시탐탐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정벌를 꿈꿨고 이때부터 일본의 의식에는 늘 복수의 칼을 갈았고 왕실에서도 그런 교육이 이뤄졌음은 '일본서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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